전시 상황을 상상하고 써보기
어떤 풍경을 상상하고 있지? 전시장에 사람이 들어와서 -설레거나, 사실 큰 관심 없거나, 눈을 얇게 아니면 크게 뜬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의자에 앉거나 서서 대화를 나눈다. 혼자, 둘이, 셋이, 가족이, 오랜 친구와, 아니면 처음 보는 사람들 모두 갑자기 동일한 역을 맡는다. 일단 수동적인 입장. 종이를 받게 될까? 가만히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아니, 그전에 먼저 이야기를 듣게 되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일단 이 사람은 여기에 없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림을 그립니다. 캔버스, 종이, 나무, 유화, 아크릴, 연필, 색연필, 콘테, 목탄, 파스텔, 먹… 그냥 평범하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그리나요? 자기 일상을 그립니다. 오만 것에 관심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본인의 인상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이 과정에서 색과 형태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 그리죠?) 당신이 이걸 왜 봐야만 하냐는 걸까요? 작가는 그림으로 특정한 서사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이야기의 흔적, 단서들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방금 언어 교육에 대한 짧은 유튜브 영상을 봤어요. 영상에서 언어의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1.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2.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3.우호적 차원의 사회적인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이것은 또한 phatic communication 또는 사회적 잡담, 잡담의 언어라고도 불림. 4. 시와 같은 미학적인 이유로 5.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 작가는 본인이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무슨 뜻일까요?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라는 말에서, 나는 폐쇄적인 세계를 떠올립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그림을 보고 내가 뭘 느끼고 뭘 생각해야하는 거죠? 언어라는 것 자체가 타인과의 교류를 근본에 두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끝없는 자기참조적 작업방식과 회화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서, 어쩌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나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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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트위터에서 읽었는데, 사람 몸의 원자는 1년동안 98프로가 바뀐대요. 나는 세포의 군집이 아닌 현상이래요. ‘나’라는 현상을 이루는 관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내가 군집이 아닌 현상이라면, 나의 공간 역시 내 세포일거에요. 내가 머무르기로 결정한 곳이니까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게 속하는 물건들을 늘어놓은 장소지요. 학교, 작업실, 자전거, 일하는 레스토랑, 전철, 공원 안의 벤치. 내가 만나고 만지는 사람도 내 일부가 될거에요. 내가 그들의 일부가 되는 것 처럼요. 나는 군집이 아닌, 현상이에요. 이 사실은 내게 위안이 되어 줍니다. 잃어버린, 사라진, 멀어진,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 모든 것이 내게 현상으로 남아 있다는 의미니까요. 나의 몸에 저장되어버렸잖아요. 어떤 흐름으로써 존재하고 있어요. 그것 역시 그들 자신이죠. 내가 당신들에게 남기는 잔상도 내 육신이고, 그대들이 내게 하고 잊어버린 말들도 그대들의 육신이에요.
캔버스를 네모난 영토라고 한다면. 혹은 내가 세운 느슨한 건축물이라고 한다면 말이에요. 그 위의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나의 육체로 빚은 감촉들, 감각들 말고 그 위의 이미지 말이에요. 표면을 반사하고 당신의 망막으로 들어가 뇌 속까지 연결되어 이루어진 빛 조각을 말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이미 그런 식으로 읽히게 된 이상, 그림은 홀로 완전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요. 물질로써 당장 나에게 속해 있었으나, 갑자기 다른 곳을 암시하고 있죠.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림, 이미지, 화면, 기호 따위의 조각들이 되어버립니다. 언어때문에 우리가 시공간을 단선적으로 이해하게 되어버렸다고 했어요.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의 흐름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이죠. 사실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혹은 현재가 조금 늦을 수도 있고요. 아니, 언어가 시간을 만들었다고도 했죠.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무슨 소용인가요? 어차피 이 글을 읽기 위해서는 저 위의 문단부터 지금 이 단어까지 차례대로 읽어야만 했을텐데.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란 우리에게 도무지 없는 것 같죠. 그림은 어떤가요? 규칙이 있고 없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도리가 없는 우리의 인지 조건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림은 어때요? 일단 시각 기능이 제대로 움직여야 되겠죠?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뭉개진 형태를 보며 끊임없이 구체적인 대상을 연상하고자 하는 우리 뇌의 시도를 막을 수 있나요? 첫 번째 감상을 지우고 두번째 감상부터 느낄 수 있을까요? 무언가를 바라보는 순간, 아니 바라보기 조금 전부터 우리는 그것과 이미 깊히 연관되어 버리죠. 우리의 몸은 그 대상과 길게 이어져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서로가 서로에게 매달려요. 거부할 수 없어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방의 바닥은 나무 바닥인데, 수평이 안맞아요. 책상도 기우뚱하고 제 시선도 미묘하게 기울었죠. 참을 수 없는 건, 의자에 앉을 때마다 다리나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의자가 책상 반대 방향으로 자꾸 돌아간다는 거에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회전 의자거든요. 지지난달에 집 건너편 건물 앞에 버려진 것을 주워왔어요. 나는 지금 몸을 왼쪽으로 반쯤 틀고 손목을 책상 끝에 걸친 상태로 힘을 주어 타자를 치고 있어요. 매 순간 중력을 느낍니다. 가만히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기 힘든 환경이에요. 저는 허리도 아프거든요. 발끝까지 저릿해요. 하지만 이것도 내 방이고 내 세포들이죠. 나를 끌어당기고 몰아내고, 나로 하여금 어거지로 힘을 쓰게 만드는 중력도 내 세포인가요? 썰렁한 농담이나 하자고 당신을 여기 앉힌건 아닙니다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아니고 이야기가 아니라, 흘러가는 풍경을 그냥 일단 내 몸으로 붙잡아 놓는 것이 지금 제가 하는 일입니다.
"흘러가는 풍경-숲과 길-얽혀있음- 늘어져 있는- 표본들" 전시 서문, 수건과 화환, 2022.11.17